“우리는 왜 사는가?”
이 질문은 너무 오래됐고, 너무 무거워서, 오히려 진지하게 꺼내는 순간 어색해지는 질문입니다.
그럼에도 이 질문을 던진다는 것 자체가 이미 삶을 가볍게 살고 있지 않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1. 삶의 의미를 ‘찾아야만’ 성공한 삶일까?
많은 어른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삶의 의미는 각자가 찾아가는 거야.”
하지만 질문을 조금 바꿔보면 이런 의문이 생깁니다.
끝내 그 의미를 찾지 못하면, 그 삶은 실패한 걸까?
이 질문에는 암묵적인 전제가 있습니다.
- 삶에는 정답이 있다
- 그 정답을 의식적으로 인식해야만 성공이다
그러나 이 전제 자체가 정말 옳은지는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2. 자살한 사람들은 ‘답을 회피한 실패자’일까?
자살을 선택한 사람들을
“의미를 찾는 과정을 중단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그 삶 전체를 단 하나의 결말로만 재단하게 됩니다.
하지만 많은 경우, 그들은
- 질문을 회피한 것이 아니라
- 너무 오래, 너무 깊게 질문하다가 지쳐버린 사람들에 가깝습니다.
삶의 의미를 끝까지 붙잡고 고민했기 때문에 오히려 더 고통스러웠을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삶을 “실패”라고 부르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안심시키기 위한 언어일지도 모릅니다.
3. 종교는 도망일까, 하나의 선택일까?
종교를 선택한 사람들에 대해
“의미를 끝내 찾지 못해 사후 세계로 도망간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른 관점도 가능합니다.
- 삶의 의미가 이성만으로는 끝까지 설명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태도
- 모든 것을 검증하고 확증해야만 한다는 강박에서 한 발 물러나는 선택
이것이 반드시 회피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오히려 “모르겠음을 인정하는 용기”일 수도 있습니다.
4. 경험은 사라지는데, 그것이 왜 의미가 될까?
“어차피 죽으면 경험은 모두 사라진다.”
이 말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중요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의미란 반드시 영원해야만 하는가?
벚꽃은 며칠이면 지지만,
그렇다고 벚꽃을 보러 간 시간이 무의미해지지는 않습니다.
의미는 영속성이 아니라
그 순간에 실제로 작동했는가로 판단할 수도 있습니다.
5. 어른들은 정말 답을 알고 있을까?
대부분의 어른들은
- 답을 알고 있어서 침착한 것이 아니라
- 답이 없다는 사실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을 뿐입니다.
“각자 찾아가는 거다”라는 말은
사실상 이런 고백에 가깝습니다.
“나도 아직 잘 모르고, 아마 끝까지 모를 것 같다.”
6. 그렇다면, 질문의 끝에 도달한 사람들은 무엇을 말할까?
흥미롭게도, 오랫동안 이 질문을 붙잡고 살아온 사람들의 공통점은 이렇습니다.
- 하나의 명확한 답을 말하지 않는다
- 대신 이렇게 말합니다
- “의미는 완성되는 게 아니라, 살아지는 것 같다”
- “의미는 발견이라기보다 관계 속에서 잠시 생겼다 사라진다”
- “질문이 사라진 게 아니라, 질문과 함께 사는 법을 배웠다”
7.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는 이유
어쩌면 삶의 의미는
- 위대한 문장
- 확정된 답
- 논리적으로 완결된 설명
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보다는
- 오늘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살아도 괜찮다는 허락
- 답이 없다는 사실을 견디면서도 관계를 맺는 능력
- 질문을 던지는 자신을 혐오하지 않는 태도
이런 것들일 수 있습니다.
❓ 자주 떠오르는 질문들
Q.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면 실패한 삶인가요?
→ 실패라는 기준 자체가 인간이 만든 개념일 가능성이 큽니다.
Q. 의미를 고민하지 않고 사는 사람들은 얕은가요?
→ 어떤 사람은 질문을 말로 하지 않고, 삶의 방식으로만 감당합니다.
Q. 이 질문을 계속 붙잡고 있는 저는 이상한가요?
→ 오히려 매우 정직한 편에 가깝습니다.
마무리하며
“왜 사는지 모르겠다”는 말은
삶을 포기하겠다는 선언이 아니라,
삶을 아무 의미 없이 소비하고 싶지 않다는 태도일 수 있습니다.
질문의 끝에 도달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아마 이렇게 말할지도 모릅니다.
“답은 찾지 못했지만,
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상태로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내가 아직 삶과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다.”
이 질문을 던진 당신은,
이미 삶을 대충 살고 있는 사람은 아닙니다.